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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12.31
제가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 법정 스님의 설법을 모은 ‘일기일회’라는 책입니다. 그 전까지 제가 읽은 책들이 대부분 경제/경영, 처세, 사회/문화 등 실생활과 관련성이 높은 내용들을 다룬 것이었기 때문에 오랜만에 이 책을 통해 마음공부를 할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오늘은 이 책을 보며 했던 생각들 중 한 가닥을 당신과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제목 자체가 보여주는 것처럼 법정 스님의 이 책은 수많은 다른 사람의 책들처럼 매 순간 주어진 삶에 충실할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기야 실천하기가 어려워 그렇지, 시간을 소비해버리듯 무의미하게 보내는 것보다 계획성 있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야 누가 모르겠습니까. 다만 이 책을 읽으며 제가 한 고민이 일반적으로 성실하게 살자는 것과 조금 달랐던 게 있다면 ‘어떻게 성실해야 할까?’라는 부분이었습니다. 똑같이 성실한 삶이라도 그 삶이 자신과 타인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 반대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하게 되었거든요.
사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과거보다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제 성장기의 호황이 끝나고 시장이 개방되며, 이른바 ‘무한경쟁’이 사회의 화두가 된 지금 개개의 사람들은 과거보다 더욱 힘겨운 경쟁을 헤쳐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캠퍼스의 낭만’으로 상징되던 대학생활은 취업을 위한 치열한 경쟁의 장으로 변한 지 오래이며, 수많은 회사원들은 직장에서의 힘겨운 생존을 이어가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외국어 학원에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과거 ‘신의 직장’ 또는 ‘철밥통’으로 불리던 공기업이나 공무원 생활 조차도 늘 직업의 안정성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과거보다 더 성실하고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더 살기 좋아지는 것 같지도, 열심히 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더 행복해지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많은 사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대답은 사회 시스템의 문제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조금씩이나마 경제는 성장하고 있고, 사람들은 과거보다 더 열심히 살고 있음에도 여전히 청년들은 직장을 구하기 힘들고 사람들은 먹고 살기가 힘들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의 분배 시스템에 심각한 이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진리처럼 외치고 있는 ‘경제발전’, ‘경쟁력 강화’, ‘세계화’라는 구호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과연 무엇이 문제인지, 그 문제의 결과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그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것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개개인은 물론이거니와 정치인, 관료, 법조인, 경제인 같은 소위 ‘사회 지도층’들이 명줄을 걸고 고민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야말로 멀쩡한 강을 새로 개발하는 것이나, 수도의 일부를 이전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급하고 중대한 일입니다.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논외로 하고 본다면 저는 열심히 살아가는 개개인이 가진 목적의식의 문제를 지적해 보고자 합니다. 앞서 요즘 사람들이 과거보다 더 성실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고 말씀 드렸고, 그 이유가 사람들을 둘러싼 경쟁이 과거보다 더 치열해졌기 때문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사람들이 열심히 사는 이유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하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경쟁에서는 왜 이기려 할까요? 여러 답이 나올 수 있겠지만 현재 우리 사회를 볼 때 결국 그 이유는 ‘더 가지기 위해서’입니다. 남보다 더 가지기 위해서, 남보다 더 풍요롭기 위해서 우리는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기려고 하고, 경쟁에서 이기려다 보니 바쁘게 살아가게 됩니다. 요컨데 ‘물욕’이 성실한 삶의 원천이 되고 있는 샘입니다.
물론 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한 지 수십년째인 지금, ‘더 가지려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아니, 사실 요즘 세태는 남보다 더 갖기 위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TV에서는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광고 카피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고 있으며, 대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아 경영해 온 한 재벌 총수입니다. 심지어 대통령을 뽑을 때에도 ‘경제를 살리겠다’는 말 한 마디에 그가 과거에 어떤 일을 해왔는지 문제삼지 않는 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모두가 이런 목표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남보다 더 갖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내가 더 갖기 위해서는 남이 덜 가져야 합니다. 자본주의의 기본을 이루는 경제학의 근본문제는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고, 재화는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남보다 더 갖겠다’는 삶의 목표는 타인의 것을 빼앗으려 하는 약탈적 목표일 수밖에 없습니다. 전 세계 식량 생산량이 모든 인류가 충분히 먹고도 남을 만큼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수만 명의 사람이 굶어 죽고 있다는 사실을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보다 더 갖기 위해 열심히 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이유는 이것이 타인의 몫을 빼앗을 수밖에 없는 약탈적인 삶의 목표라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열심히 사는 개개인을 위해서도 대개 이와 같은 삶의 방향성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남보다 더 갖겠다’는 목표는 타인과의 비교를 전제로 합니다. 비교의 대상이 타인이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해도 목표를 성취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이 나보다 더 노력했거나, 남이 나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출발했거나, 남이 나보다 더 운이 좋았을 경우 나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 버립니다. 항상 남보다 앞서야 하기 때문에 늘 조급해지게 마련이며, 때로는 내가 더 잘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못하기를 바라게 됩니다. 우리 사회에 반칙과 비리가 난무하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을 지도 모릅니다.
결국 남보다 더 가지려는 삶은 자신과 타인을 모두 피폐하게 만듭니다. 목표를 이룰 경우는 타인을, 그렇지 못할 경우는 자신을 피폐하게 만들 가능성이 큽니다. 타인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반칙의 유혹에 빠지게 마련이며, 유혹을 이기지 못한다면 목표를 이루더라도 남들의 존경을 받기는커녕 손가락질을 받게 마련입니다. 아니, 꼭 남들이 손가락질하지 않아도 우리 안의 양심이 자신을 탓하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위해 우리의 시간을 써야 할까요? 조금은 추상적인 이야기지만 열심히 사는 목표를 조금만 바꿔보면 훨씬 더 좋은 상황을 만들 수 있습니다. 더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나아지기 위해서 살면 됩니다.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면서도 자신과 타인을 모두 풍요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더 나아진다’는 개념이 추상적인만큼 사람이 더 나아지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다른 요소가 동일하다고 가정할 때 나는 오늘 한 권의 책을 더 읽어서 ‘지식’이라는 측면에서 더 나아질 수 있고, 길가의 쓰레기를 하나 더 주워서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측면에서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점심 식사 후 직장 동료와 커피 한 잔을 하며 직장 동료에게 좋은 책 한 권을 추천한다면 그 또한 나를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은 더 가진 사람이 되는 방법보다 훨씬 다양하기 때문에 더 나아지려는 삶의 목표는 더 가지려는 삶의 목표처럼 개개인의 목표가 충돌하여 이 사람의 꿈이 저 사람의 꿈을 부수는 경우를 피할 수 있습니다. 자신과 타인이 동시에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삶의 목표는 비교의 대상이 타인이 아닌 현재의 나 자신이기 때문에 타인을 경쟁상대로 삼을 때보다 여유롭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작은 행위 한 두 가지의 실천만으로도 매일 매일 나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기 때문에 훨씬 더 여유로운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더 나아지려고 노력한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에 ‘더 나아지겠다’는 목표와 ‘노력한다’는 수단이 하나가 되어, 노력하는 자체만으로도 삶의 목표에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항상 더 나아지기 위해 하루의 시간도 헛되이 보낼 수 없기에 우리는 나태함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연히 우리의 삶은 더 가지려고 할 때보다 풍요로워집니다. 더 가지려고 한다고 더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더 나아지려고 하면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당신에겐 더 가지려는 삶과 더 나아지려는 삶에 관한 이 모든 이야기가 헛되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이 팍팍한 삶의 현실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너무나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생각될 지도 모릅니다. 제가 앞서 언급한 사회 시스템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개개의 사회 구성원들이 마음가짐을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패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해서 개개인의 부패한 삶이 정당화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비록 우리가 더 가지려는 삶을 부추기는 사회에 살고 있다고 해도 개개인의 삶의 자세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개개인이 자신의 삶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할 때 너무나 거대해 보이는 사회적 시스템 또한 바뀔 수 있습니다. 요컨데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과 내 삶의 자세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선후의 관계를 가진 것이 아닌 동시에 추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 가지도록 부추기는 사회와 더 가지려고 발버둥 치는 개인은 서로를 강화시키는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의 목표와 자세를 돌아보고 더 나은 자신을 만들어 가려는 노력은 어떤 사회, 어떤 시대에 살아가는 개인에게도 요긴한 일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작은 하나부터 실천하려고 노력한다면, 분명 우리의 삶은 어제보다 나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