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감상문'에 해당되는 글 5건
- 2009.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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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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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고 말했다.
군부독재 시절 대한민국의 대통령들과 여당은 민주화 세력을 '국론을 분열시키는 이적단체'로 몰아붙였다. 간혹 근래에도 반대파를 향해 'OOO은 국론을 분열시켜 사회 혼란을 조장하고 있다'는 식의 정치적 공격이 횡행하는 것을 보면 '국론을 통일하고 전 국민이 똘똘 뭉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하나의 공공선인 모양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정말 한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통일된 '국론'이라는 것을 갖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아니, 바람직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게 가능하기는 한 걸까?
이 책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보면 '국론의 통일'이라는 말이 갖는 허구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기본적으로 '국론의 통일'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혹은 동의해야 하는!) 하나의 절대적으로 올바른 생각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서로 다른 입장을 존중하고 토론과 절충을 통해 하나의 공동분모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옳은 하나의 입장을 모두가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국론통일의 실체라는 말이다. 하지만 한 가족 내에서도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 마련인데 한 국가 안에 모두가 동의하는 '절대진리'가 있을 리 없다. 결국 힘 있는 자, 권력 가진 자의 입장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으로 강변되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고 우리는 이미 우리의 역사를 통해 수차례 그것을 경험한 바 있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조선 후기 사회가 그러했다. '예송논쟁'을 둘러싸고 벌어진 치열한 당쟁은 기본적으로 '옳은 것은 나이니 넌 내 뜻을 따르든지 그렇지 않으면 죽어라'라는 다양성에 대한 부정과 다른 시각에 대한 거부에 기반한 싸움이었다. 그렇기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서인이 북인을, 남인이 서인을, 그리고 서인이 다시 남인을 죽이는 비극의 재생이 이루어진다. 나와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을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끌어앉지 않고, 거부하고 부정하고 나아가 제거하려 하는 당시의 정치현실이 결국은 조선이라는 사회를 파국으로 끌고 간 원동력이었음을 보고 있자면 '국론의 통일'이라는 발상이 얼마나 위험한 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얼마 전 우리는 '정치보복'에 가까운 법 적용으로 인해 전직 대통령 한 사람을 잃었다.지난 정권의 통치 기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르며, 국정의 파트너여야 하는 야당을 부정하고 배척하는 행위로 인한 비극은 2009년 오늘에도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의 입에 재갈을 채우고자 상대 당을 공격하고 언론을 압박하는 행위는 17세기 조선에만 존재했던 특이한 사건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런 행위의 결과가 어떤 나라를 만들어가는지 우리는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전략)... 그가 신봉했던 주자학은 당시 조선에서 이미 학문이 아닌 정치적 도그마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비극은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절대성의 비극이자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도 파괴하는 전체성의 비극이었다...(후략)..."
송시열과 노론이 조래한 이 비극은 2009년 오늘 대한민국 안에서도 잉태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2009.07.23>
지도 밖으로 행군하다 (한비야 저, 푸른 숲) (0) | 2009.1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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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글쟁이들 (구본준 저, 한겨레출판) (0) | 2009.12.31 |
불편한 영화, 밀양 (0) | 2009.12.29 |
원초적 본능2 - 약해진 그녀의 포스를 아쉬워하다... (0) | 2009.1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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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글쟁이들'을 쓴 구본준에 의하면 출판시장에서 판매부수가 50만부 이상이라는 것은 상업적인 견지에서 작가의 차원이 다르다고 한다. 50만부를 넘기 위해서는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것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좌우 모두에게 호응을 받아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책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내가 처음으로 읽은 한비야의 책이었지만, 이 책 한 권으로도 그녀의 글이 그토록 '잘 팔리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우선 그녀의 글은 쉽다. 마치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독자와 대화하듯 쓰여졌기 때문에 책장이 막힘 없이 술술 넘어간다. 소리내어 읽어봐도 말이 꼬이는 데가 없이 쉽게 읽어지는 것이 문장의 길이, 호흡, 그리고 운율에까지 작가가 상당한 정성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어의 선택이나 단락의 구성 또한 겉멋을 부리지 않고 단순명료한 편이어서 보는 사람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또한 그녀의 글은 중립적이다. 이 책 '지도 밖으로 행군하다'는 긴급구호 활동을 담은 글답게 아프가니스탄이라든가 이라크, 팔레스타인, 북한처럼 정치적으로 복잡한 상황에 놓인 지역에서의 일들을 담고 있다. 그러니만큼 글쓴이의 정치적 견해가 - 원하든 원치 않든 -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마련인데, 그녀의 경우는 분쟁 지역에서 엄격한 중립을 지켜야 하는 NGO 요원답게 어설프게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철저히 생명, 인권, 인도주의라는 보편적 가치에 입각해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이든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유일하게 그녀가 정치적 입장을 드러낸 것은 팔레스타인에서의 긴급구호 경험을 다룬 부분인데 여기에서도 자신의 견해가 존재할 수 있는 여러 견해 중 하나일 뿐임을 제삼 제사 강조하고 정치색을 희석시키고자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세번째로 그녀의 책은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으면서도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는 글감을 다룬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이 책 이전에 그녀가 쓴 세 권의 책은 일종의 기행문이었다. 여행이라는 것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으면서도 일상에 찌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설렘을 주는 소재이다. 물론 이 책은 '긴급구호'라는 상대적으로 생소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같은 맥락의 주제라고 보인다.
하지만 다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그녀의 장점은 그녀가 지식이 아닌 삶을 책으로 옮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의 모든 책은 책상 앞에서 짜낸 글이 아닌 그녀 자신이 두 발로 움직이며 세상과 마주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철저히 자신의 삶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은 그녀의 글이 추상적이거나 어렵지 않고 누구에게나 공감하고 감동을 줄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그녀가 써내려가는 한 문장 한 문장이 그녀의 진실을 담고 있기에 독자들 또한 그녀의 글에서 거짓됨 없는 설득력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늘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돕는 것보다 사람들을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하는 사회 구조를 바꾸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내내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비록 구조적 변화가 더 중요하더라도 개개의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지원하는 것 또한 늦출 수 없는 시급한 문제라는 것이었다. 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할 때도 고통을 완화시키는 치료와 병의 근원을 뿌리뽑는 치료를 병행하듯, 사회적 모순에 의한 인간의 문제를 다룰 때에도 두 가지 실천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그녀의 책을 통해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2009.07.13>
국론은 분열되어야 한다! (이덕일 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고) (0) | 2009.1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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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글쟁이들 (구본준 저, 한겨레출판) (0) | 2009.12.31 |
불편한 영화, 밀양 (0) | 2009.12.29 |
원초적 본능2 - 약해진 그녀의 포스를 아쉬워하다... (0) | 2009.1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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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한 글쓰기에 대한 환상 내지 로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 하나이다. 비록 생업이 바쁘고 지닌 바 역량이 일천하여 많은 글을 쓰지는 못하지만, 어려서부터 가꿔온 글 쓰는 사람에 대한 동경은 언제나 내 마음 한 켠에 자리하고 있다. 더구나 출근부터 퇴근까지 타인에 의해 꽉 짜여진 직장인의 삶을 살게 된 후에는 자유롭게 스스로의 스케쥴을 관리하며 글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저술가라는 직업에 대한 막연한 부러움을 갖게 되었다.
'글'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직업인 일간지 문화부 기자로 일하고 있는, 그리고 1년에 200권이라는 어마어마한 독서량을 자랑하는 이 책 '한국의 글쟁이들'의 저자(<한겨레> 문화부 구본준 기자) 또한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다보다. 글 하나를 무기로 이 각박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브랜드를 구축하고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 18명의 글쟁이를 찾아가 글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이 책의 기획의도를 보는 순간, 나는 책값도 확인하지 않고 서점 계산대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단숨에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내가 얻은 것은 '글쟁이'에 대한 나의 환상이 깨어지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책에 소개된 18명의 한국 대표 글쟁이들은 내가 상상했던 글쟁이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 책에 소개된 글쟁이들의 삶은 결코 여유롭거나 유유자적하지 않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자기 스스로 할 일을 정하고 일정을 관리하기는 하지만, 그 '스스로 만든 일정'이라는 것이 결코 녹녹치 않기 때문이다. 이 글이 소개하는 18명의 글쟁이들 중에는 교수 출신도 있고, 박사 출신도 있고, 기자 출신이나 심지어 대기업 부장 출신도 있지만 그 중 누구도 삶을 '여유롭게' 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에 의해 짜여진 스케쥴 속에서 살아가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 치열하고 꽉 짜여진 생활을 하고 있다. 세상이 만만치 않음을, 글 하나로 이름을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지를 보여준다고 할까?
비록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빡빡한 삶을 살고 있다고는 해도 여전히 책과 글을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아름답다. 자유롭다기 보다는 자율적인 생활자세로 진지하고 치열하게 세상을 대하는 열 여덟 사람의 삶에 대한 소개는, 나처럼 글쓰기에 대한 환상을 가진 사람 뿐 아니라 '책을 좀 더 읽어야 하는데..'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진 누구에게나 유익하다. 더불어 저자 본인의 필력이 또한 만만치 않아서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이 책의 장점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18명의 글쟁이를 알게 됨으로써 앞으로 읽을 책의 목록을 손쉽에 손에 넣을 수 있다는 부수적인 장점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3~4시간의 투자로 충분히 그 이상의 가치를 얻을 수 있는 책이다.
<2009년 6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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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너스 : 18명의 글쟁이들의 5 가지 공통점
1. 일정한 생활 패턴을 가지고 있으며, 규칙적으로 글쓰기에 몰입한다.
2. 쉽고, 간결한 문장으로 쓴다.
3. 독자가 무엇을 원하는 지를 먼저 생각한다. (기획적 사고)
4. 자료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며, 메모하는 습관을 갖는다.
5. 다독, 다작, 다상양
국론은 분열되어야 한다! (이덕일 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고) (0) | 2009.1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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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밖으로 행군하다 (한비야 저, 푸른 숲) (0) | 2009.12.31 |
불편한 영화, 밀양 (0) | 2009.12.29 |
원초적 본능2 - 약해진 그녀의 포스를 아쉬워하다... (0) | 2009.12.29 |
오아시스의 기억
나는 일단 영화를 보러 극장에 들어가면, 아무리 영화가 형편없어도 잠을 자거나
중간에 나오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기 보통들 그럴 것 같다.) 실수로 정말 쓰레기
내지 시간낭비라고 생각되는 영화를 골랐다고 할지라도 상영시간이 끝날 때까지는
(비웃어가며) 봐 주는 편이다.
그런 내가 상영중에 나와버렸던 영화가 딱 하나 있었다. 그게 바로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였다. 물론 오아시스가 형편없는 영화라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운 이유로 나는 그 영화를 끝까지 볼 수가 없었다.
너무나 리얼하게 그려진 장애를 가진 이들의 삶을 보기에 앞서서 나는 절대로 영화
에 그려진 장애인들을 동정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었다. 동정은 동정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동정의 대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또 한번 절망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 - 신영복 선생님의 책에 나온 말이다 - 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마음먹고 영화를
관람했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엄청난 불편함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영화의 중간
에 이르렀을 때, 나는 불편함의 근원이 내가 그들을 동정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을 보며 안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어느새 난 스크린에 그려진 그네들의 힘겨운 삶을 보며, 비열하게도 내가 그들과
같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시점부터는 바늘방석에
앉은 것같아 더 이상 영화를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창동의 명작 '오아시스'는,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중간에
나와버린 영화가 되었다.
불편함
오아시스 이후 처음으로 전직 문화부 장관의 영화를 보러 간 나는 실로 오랜만에
그 때의 그 불편함을 느껴야 했다. '2시간 반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라고
내게 이 영화를 추천한 이가 말했지만, 나는 그 2시간 반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몇 번이나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정도다.
그 불편함은 어디서 나왔을까...?
그것은 아마도 Reality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인간이 겪게 되는 고통,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거나 혹은 잊어버리고자 하는 몸부림.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현실.
너무나 담담하게, 그리고 너무나 직설적으로 그려진 그 장면들을 보는 것은 내겐
참으로 고통스러운 '노동'이었다. 감독에게 임금을 요구하고 싶을 정도로...
다행이 내가 아직 미혼이고, 아이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내게 아이가 있었다면
또 한번 나는 극장을 뛰쳐나왔을 지도 모른다. 내 아이가 저렇게 되지 않았음에
안도하는 스스로의 비열함을 또 한 번 발견하고...
정말로 커다란 고통은 그 고통을 제 3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는 이에게도 상당한
고통을 강요한다. 하물며 그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당사자에게는 어떨까?
아마도 죽거나... 혹은 미치거나...
종교 = 아편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일찌기 공산주의자들은 종교가 인민들이 자신이 처한 (착취당하는) 현실을 망각
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종교의 해악을 지적했다. 이 이야기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떤 면에서 이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이 영화속의 이신애는 자신에게 닥친 엄청난 불행과 그 불행이 가지고 온 엄청난
고통속에서 일종의 피난처로서 '종교'를 찾게 된다. 그리고 한동안이나마 그 종교
로부터 얻은 '마음의 평화'로 인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듯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영화의 그 부분을 보며 내내 불편했다.
이신애는 과연 종교를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 것일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저런 이유를 댈 것 없이, 한 순간 그녀가 얻었던
평화가 그토록 형편없이 무너져 버린 것이 그 '마음의 평화'가 진정한 해결이
아니었음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그 '마음의 평화'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이 마치 진통제와 같은 무엇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한다. 진통제가 환자
의 고통을 완화시킬 뿐 근본적으로 병을 치료하지 못하는 것처럼, 종교는 그녀에게
자신이 처한 참담한 고통을 잠시 잊게 했을 뿐 그녀를 구원한 것은 아니었다.
종교를 통한 평화라는 것이 많은 경우 그렇다.
종교는 개인의 삶에 질곡으로 다가오는 현실적인 문제들 - 그것이 금전적인 것이든
인간관계에 의한 것이든, 이신애의 그것처럼 아주 특수한 무엇이든 - 을 정면으로
대치하고 문제를 풀어나가기 보다는 '신의 섭리'로 간주하고 '초월'하고자 하는
자세를 견지한다.
나는 이것이 많은 부분 아편 - 혹은 진통제 - 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상처를
치유하기보다 그 상처를 잊도록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게 꼭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만약 치료가 불가능한 상처라면 고통이라도 덜어내고자 하는 것은 병원
에서 진짜 환자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로 사용하는 해법이니까.
하지만 한편으로 이처럼 고통만을 덜어내는 처치법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고, 그
불안정함이 내내 나를 불편하게 했다.
결국 그 불안정함은 균열을 맞는다.
기독교의 하나님
이신애를 최종적으로 절망하게 한 것은 당연히 그녀에게 닥쳐온 엄청난 때문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그것은 잠시간 그녀를 평화롭게 했던 기독교에서
비롯되었기도 하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을 선인과 악인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내가 기독교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바가 맞다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은 '하나님을 받아들인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구분한다. 기독교의 천국에서 받아들이는 인간은 '죄를 범하지
않은 자'가 아니고 '죄를 회계한 자'다. 왜냐고? 어차피 기독교의 시각으로 모든
인간은 죄인이니까.
다시 말하면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밀양에 내려와 아이와 단 둘이 의지하며
살다가 그 아이를 유괴범에게 잔혹하게 잃은 이신애나, 이신애의 아이를 납치하여
돈을 빼앗고자 하고 아이를 살해하여 그녀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학원 원장
이나 기독교의 하나님에게는 똑같은 죄인이며, 따라서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죄를
회계하고 하나님을 모시면'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길
잃은 어린 양인 것이다.
신의 논리로 이쯤은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자식의 유괴 살해범과 똑같은 '어린양'이 된 누군가에게 이것보다 더
잔혹한 논리는 없다. '나'라는 개인이 아무리 선하게 살아왔어도 죄 - 선량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는 누구에게는 뭔지 알 수도 없는 그 죄 - 를 회계하고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한 나는 유괴 살인범과 다를 바 없고, 설사 회계하고 하나님을 모시
더라도 유괴 살인범이 똑같은 절차를 거칠 경우 역시 다를 바 없다는 것은
신이 아닌 인간에게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무엇이 아닐까.
내가 내 삶에서 '하나님을 받아들일 기회'가 수도 없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어
지옥에 갈 리스크를 감수해가며 그러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일신교가 싫다.
세상 사람을 그들 자신의 Performance로 평가하지 않고, 그가 누구를 모시냐
를 가지고 평가하는 일신교의 오만함이 나는 싫다. 이 영화를 보며 다시금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Epilogue : 여배우 전도연
이 영화를 내게 권한 그 사람은 내게 이 영화에서의 전도연의 연기에 대해,
'이것은 깐느영화제 여우주연상감을 넘어 노벨 평화상 정도는 줘야 할 연기다.'
라고 농담섞인 극찬을 했다.
내가 그녀의 연기를 본 느낌은 다음과 같다.
"나는 밀양을 보는 내내 특별히 전도연이 연기를 잘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신애라는 인물을 보았을 뿐 전도연이라는 연기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신애의 어디에도 '전도연'이라는 연기자가 연기한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한 줄 요약
영화 밀양, 평점 : ★★★★☆
<2007.06.07>
국론은 분열되어야 한다! (이덕일 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고) (0) | 2009.1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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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밖으로 행군하다 (한비야 저, 푸른 숲) (0) | 2009.12.31 |
한국의 글쟁이들 (구본준 저, 한겨레출판) (0) | 2009.12.31 |
원초적 본능2 - 약해진 그녀의 포스를 아쉬워하다... (0) | 2009.12.29 |
국론은 분열되어야 한다! (이덕일 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고) (0) | 2009.1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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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밖으로 행군하다 (한비야 저, 푸른 숲) (0) | 2009.12.31 |
한국의 글쟁이들 (구본준 저, 한겨레출판) (0) | 2009.12.31 |
불편한 영화, 밀양 (0) | 2009.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