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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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생각하는 자, 후회하는 자, 어리석은 자... 에피메테우스. 어쩌면 우리 모두를 지칭할 지도 모르는, 패자로 둔갑한 평범한 자의 이름. 우리를 가둔 생각의 상자밖으로 나간다면, 그를 향한 시선도 조금 더 따뜻해질 지 모르겠다.
by 나사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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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의 대학생이자 게임과 인터넷 서핑을 좋아하는 K씨는 오늘도 인터넷에 접속,
활발한 온라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며칠전 지하철에서 고양이 오줌을 치우지 않고 사라진 H모양을 '사냥'하는데 단단히 한몫하여, 이번에도 한국사회가 한결 아름다워지는데 3g 공헌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K씨는 인터넷에서 뜻밖의 글을 발견한다.

<지하철에서 고양이오줌녀 사건을 목격한 사람입니다.>

보는 이의 시선을 확 잡아끄는 제목을 본 K씨는 본능적으로 제목을 클릭한다. '이거 낚시 아냐?'라고 생각하며..

글의 내용은 글쓴이가 고양이오줌녀 사건을 목격했고, 실제 전후사정은 고양이오줌녀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고 그녀의 잘못도 있지만 그게 다는 아니라는 주장
이었다.

K씨는 잠시 생각에 빠진다.

'어... 그럼 이거 내가 잘못 생각한건가?'
'아냐 그럴리가... 그렇게 많은 네티즌들이 그럼 엄한사람 잡았단 말이야?'
'말도안돼. 이 글은 분명히 어떤 찌*이가 지어낸 거거나 고양이오줌녀를 아는 사람의
소행일거야.'
'그런 나쁜X는 좀 당해봐야해. 그만한 잘못에 얼굴까지 공개되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는건 잘못되었다는 X들도 있지만 그건 걔들이 잘못 하는거야.'
'옳은건 나야. 내가 틀릴리가 없어.'

물론 자신의 이런 판단에 제대로 근거가 될 수 있는 fact가 하나도 없다는 것 따위는
K씨의 고려대상이 아니다.

K씨는 이번엔 다른 글을 클릭한다. n모 커뮤니티에 올라온 인터넷 기사였고, 기사 내용은 아이를 학대한 것으로 알려저 네티즌들의 마녀사냥을 당한 한 선생이 실은 학대한 일이 없다고 밝혀졌다는 내용이다.

K씨는 마음이 몹시 불편하다. 자신도 그를 사냥한 헌터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K씨는 또 생각한다.

'아.. 띠.. 짜증나...'
'이건 다 찌질스런 인터넷 기사쉑히들 때문이야. 왜 이상한 기사를 올려서...'
'당한 선생한텐 안됬어도 내 잘못은 아냐. 이상한 기사올린 기자X이 나쁜X이지.'

자신이 인터넷 기자 못지않게 찌질했음은 까맣게 잊은 K씨. 인터넷뉴스의 메인화면으로 화면을 이동한다.

K씨가 본 또다른 기사는 H모 교수와 M모 방송사의 이야기다. 혁혁한 업무성과로 학계의 총아를 받던 H모 교수의 연구성과에 대해 비판하는 방송을 했던 M모 방송사를 때려잡는데 선봉에 섰던 K씨로서는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는 기사이다.

기사의 내용은 실제 H모 교수의 연구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짙다는 것이었고 자연히 이를 본 K씨, 잠시 당황한다.

'뭐야...H교수가 나쁜거야?'
'난 H교수가 좋은거고 M방송사가 나쁜건줄 알았는데 반대네?'
'아 띠... H교수 나쁜X. M방송사한테 살짝 미안하네? 이쯤되면 글 하나 써줘야지.'

<세기의 사기꾼 H교수, M방송사에 사과합니다.>

글을 작성하고 있는 K씨.
아직까지 교수의 연구가 정말 잘못되었다는 것이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무의식의 저편으로 넘겨버린다. 또한 어느쪽이 사실인지에 앞서 M방송사가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언론으로써의 기본적인 원칙을 져버린 것 - 그가 M방송사를 성토할 때 그토록 중요시했던 문제인 - 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어차피 K씨의 두뇌구조는 모든 것을 좋은넘/나쁜넘으로 구분할 뿐 옳고 그름의 역학 관계가 갖는 복합성이나 복잡성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뿌듯한 마음으로 글을 작성하고 확인 버튼을 클릭한 K씨는 또다른 사냥감을 찾기 시작한다.

'응? 이게 뭐야? 시위도중 전경 부상?'
'시위대 이 깡패같은 쉑히들... 또 무슨 짓을 한거야?'
'좋다. 이 정의의 사도 K가 나서서 너네를 심판해준다.'

또 한편의 글을 작성하는 K씨. 그러나 그는 시위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모른다. 세상에는 사냥해야할 마녀들이 너무 많기때문에 인터넷의 '저지드래드'인 K씨에게 사실관계를 파악할 여력같은건 없으니까....



<200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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